0. 서양 현대미술의 추상은 난해하여 관련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민화는 현실과 항상 공존하는 내용이어서 친숙하고, 진솔하고, 건강하고, 사랑스럽다. 또한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며, 솔직하고, 해학이 있다. 빛나는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해석한 자연과 사물이 명쾌하고 담백하다. 이는 전문교육을 배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감성과 심성의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예술의 전당, 『판타지아 조선 : 김세종민화컬렉션』, p.11




0. 민화는 곳곳에 추상미가 가득하지만 어렵지 않다. 또한 민화의 추상은 완성도가 높다. 이것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작업 과정에서 단순하게 정리된 추상이라 더없이 건강하며 완벽한 골격미를 이룬다. 여기에 해학을 가미하여 재미있고, 더 이해하기 쉽고, 아름답다. 추상미와 해학미가 공존한다. - 예술의 전당, 『판타지아 조선 : 김세종민화컬렉션』, p.11



1. 선비들의 취향이 가득 담긴 서재, 동양의 모든 보배들이 욕심껏 그려진 상상 속의 판타지. 화려한 비단 책갑으로 둘러싼 책들과 함께 자리한 아름다운 도자 화병과 접시 위 올려진 과일들. 살면서 한 번 보기 어려웠을 귀한 것들과 바다 너머 존재하는 영롱한 꾸밈거리들. 단정하게 놓인 모양새 속에 각자의 빛을 발하는 책과 물건들. 이 장면을 어떻게 입체 공간 안에서 풀어낼 수 있을까?



2. 이탈리아 귀족들의 거대한 서재, 비밀의 방, ‘스투디올로(studiolo)’. 이 풍경이 선교사들에 의해 청나라를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탈리아의 ‘스투디올로’도 중국의 ‘다보각경(多寶閣景)’도 아닌 조선의 책가도. 무엇이 책가도를 특별하게 하는가?



3. 책가도는 정작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번성하고 인기를 끌어 왕실, 귀족뿐 아니라 후기에는 민가에서까지 다양한 내용과 형태로 그려졌다. 양식적으로는 ‘책을 주 소재로 하는 정물화’지만, 자유롭게 표현이 확장된 책가도에는 화려하고 개성 강한 표현이 넘쳐나고 다양한 해석과 변주가 녹아들어 ‘추상 정물화’가 된다. 조선 책가도에는 여러 방면에서 경험적으로 바라본 시선을 재구성하는 다시점 구도, 토끼나 사슴, 부채 같은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배치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이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4. 조선 판타지아의 가구 실험은 미학적 의미와 개념적 의미를 드러내는데 중점을 두고, 전통적인 소재를 가장 현대적인 소재로 치환해 전개한 작업이다. 일정치 않은 비율과 쏟아질 듯 비스듬하게 설치된 면들은 시점에 따라 서로 다른 크기와 형태로 비춰지는 다시점 구도 회화의 입체적 연출이고, 속이 비어있으면서도 동시에 촘촘히 찬 투명 판넬은 현대 건축에 흔히 쓰이는 소재로 빛을 반사하고, 흡수하고, 굴절시키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장치가 된다. 투과가 되는 것도 아닌 것도 아닌 상태로 시각적 혼란을 야기하는 새로운 물성의 낯선 조화는 우리가 의도한 그대로이다.